
18.7.22
(간증) -박미정-
"중첩된 고난을 겪던 저에게 이길 힘을 주시고, 가족을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 드립니다.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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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전남 해남 시골마을의 열심히 우상을 섬기는 집 안에서 태어나 자랐습니다. 불교 신자인 할머니는 아버지와 장남인 큰오빠 생일만 되면 집에 무당을 불러 굿을 할 정도로 지극정성으로 우상을 숭배하고 미신을 따랐습니다. 워낙 깊은 산골이어서 동네에 교회가 없었는 데, 언제부터인가 친구 집의 한 작은 방에서 예수님을 믿 는 사람들이 모여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며 성경을 공부 하기 시작했습니다. 시내에 있는 교회의 집사님들이 매주 심리가 넘는 먼 길을 걸어 그 집에 오셔서, 예배를 인도하 고 몇 안 되는 신자들에게 찬송가와 성경을 가르쳐 주셨 습니다.
저도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 저희 어린 아이들에게 찬송과 성경을 가르치는 모임에 여러 번 참석하였습니다. 찬송하고 성경말씀을 듣고 배우는 것이 너무 좋아서 할머 니와 엄마 몰래 밭둑으로 기어가 친구 집에 다녀오곤 하 였습니다. 그러다가 할머니에게 들키면 혼쭐이 날 정도로 크게 야단을 맞았습니다. 할머니는 어린 저한테 한 집안 에서 두 신을 모시면 집안이 망하게 된다는 말을 자주 하 셨습니다.
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 올라와서 직장 생활을 시작하 였습니다. 난생 처음 부모님 곁을 떠나고 멀리서 그것도 서울에서 생활하려니 무척 외롭고 두려웠습니다. 버스를 타고 가다 길모퉁이에 난 풀만 봐도 고향 생각이 나고 반 갑고 또 서러워서 눈물을 쏟았습니다. 직장 생활을 한지 2 년이 되었을 때에 친구에게 남편을 소개받아 결혼하였습 니다. 착하고 성실해 보여서 좋았는데, 막상 결혼을 하고 보니 남편은 술과 친구를 너무 좋아하였습니다. 그래서 집안일은 늘 뒷전이었습니다.
1990년 3월, 권사님의 전도로 우리 교회에 나와서 결신 을 하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고된 시집살이와 남편의 늦은 귀가 때문에 힘이 들어 혼자 울 때가 많았지 만 어린 아들을 등에 업고 교회에 와서 하나님께 기도하 고 찬송하며 예배할 때면 더없이 행복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저에게 감당하기 힘든 시련이 찾아왔습니 다. 1995년 5월 어느 날, 둘째 오빠가 음주운전을 한 사람
의 차에 치여 사경을 헤매게 되었습니다. 사고 소식을 듣 고 6시간을 달려 전남 순천에 있는 병원에 도착해서 오빠 의 모습을 보는 순간 저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 습니다. 오빠의 양 손과 발이 침상에 묶여 있고 코는 산소 마스크를 쓰고 있었습니다. 운전자는 이미 사망했고 생 존한 다른 사람도 오빠와 같이 중태였습니다.
의사 선생님은 오빠의 뇌가 다 망가져 회복이 어렵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당장 목을 절개하여 폐까지 산소호흡 기 호스를 연결해 꽂는 수술을 해야 한다면서 지금 결정 하라고 채근하였습니다. 당시 저는 29살, 큰오빠는 33살 이었고 아빠 엄마는 세상 물정 잘 모르는 시골 농부이셨 습니다. 큰오빠는 사방팔방으로 사고경위를 알아보느라 정신이 없었고 부모님 역시 도움이 되어줄 누구 한 사람, 돈 많은 친척이나 힘과 능력이 있는 지인 한 사람이 없었 습니다. 정신이 아득했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바라며 하 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8살 아들과 5살 딸을 동생에게 맡기고 보름씩 부모님 과 번갈아 가며 오빠를 간병하였습니다. 실어증과 기억상 실증에 걸리고 식물인간이 되어 중환자실에 누워있는 오 빠를 일으켜 세워 몸을 씻기는 등 간병하는 일이 정말 힘 들었습니다. 그동안 해본 적이 없고 본 적도 없던, 목에서 가래를 빼어내는 석션을 할 때마다 무섭고 떨렸습니다. 한 달이 지나도 영 차도가 없었습니다. 잠시 집에 올라와 서 밀린 집안일을 하고 세금을 내고, 그리고 남은 돈을 가 지고 병원으로 내려가기를 반복하였습니다.
저에게는 아들과 딸이 제 인생의 전부나 다름없었습니 다. 그런 자녀를, 그 손자와 손녀를 시어머니가 잘 돌봐줄 것으로 기대했으나 시어머니는 위로의 전화 한 통조차 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런 시어머니가 이해가 안 되고 섭섭 한 마음에 더 심신이 고달팠습니다. 덩달아 남편도 미워 졌습니다. 하나님께 호소하고 하나님의 도움만 바랄 뿐 사람에게는 그 어떤 것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 다. 가족 중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저 혼자였습니다. 저 는 단장의 고통 중에, 요나의 기도를 생각하며 간절한 기 도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오빠가 사고를 당한지 43일째가 되었을 때였습니다. 제 가 옆에서 기도하고 있는데, 오빠가 의식이 회복되고 사고 순간을 떠올렸는지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도망을 치려는 몸짓을 하였습니다. 저는 놀랍고 기쁜 마음에 한 걸음에 간호사실로 달려갔습니다. 정말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습 니다. 그 때부터 저는 틈틈이 오빠에게 찬송가와 설교말 씀을 들려주고 성경을 읽어주었습니다.
오빠를 간병하는 동안 제 몸무게가 8kg이나 줄었습니 다. 남편과 헤어지고 시어머니 눈치를 안 보면서 오빠간 병에만 전념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남편과 시어 머니를 이해시킬 자신이 없었고 또 남편에게까지 큰 짐을 지우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루는 남편 앞
에서 무릎을 꿇고 빌면서 '당신을 사랑하고 아이들도 너 무나 사랑하지만, 지금은 오빠를 살리는 것이 더 우선'이 라고 말하며 이혼해 달라고 애원했습니다. 그러자 남편 은 '왜 그 무거운 짐을 당신 혼자서 다 지려고 하느냐, 나 와 아이들은 당신에게 어떤 존재냐?"고 물었습니다. 그 후 남편은 자주 순천에 내려와 같이 오빠를 간병해 주었습니 다. 그런 남편이 큰 힘이 되었고 고마웠습니다.
입원한지 1년이 되자 병원에서 더 이상은 할 것이 없다 며 장애 2급 판정을 내리고 퇴원을 시키므로 해남의 친정 집으로 오빠를 데리고 내려왔습니다. 의식은 돌아왔으나 여전히 대·소변을 갈아주고 몸을 닦아주는 등의 간병을 해야 했습니다. 많은 빚, 지친 심신, 치매 걸린 할머니, 눈 물이 마를 날이 없는 아빠와 엄마. 그럼에도 친정 식구 들은 좀처럼 마음 문을 열지 않고 요지부동 전도를 거절 하였습니다.
그렇게 14년이 지나서 더 큰 시련이 찾아왔습니다. 이번 에는 큰오빠가 사고를 당하여 위독한 상태로 광주의 대학 병원 중환자실에 있게 되었습니다. 오빠는 "예수님을 믿 고 구원 받으세요!" 하는 제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눈 한 번 뜨지 못하고 말도 한 번 하지 못한 채 사고 13일 만에 숨을 거두었습니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 도 듣지 못한다."고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처절하게 다 가왔습니다.
그 큰일을 치르고 난 뒤 저는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와 힘을 받아 몸과 마음을 추스르고 열심히 하나님께 예배 하고 주님을 섬기면서 친정과 시댁 식구들을 전도하였습 니다. 전도와 저의 기도가 헛되지 않았습니다. 작은 오빠 의 병고와 큰오빠의 갑작스런 죽음을 통해 인생의 무상 함과 사람의 무능함을 절실히 깨닫게 되었고 우상숭배가 헛되고 미신을 따르는 일이 허망한 일인 것을 알게 된 친 정 아버지와 어머니와 동생이 결국 예수님을 영접하고 동 네 교회에 가서 결신을 하고 하나님을 신앙하게 되었습니 다. 그 후 어머니는 먼저 천국에 가셨고, 아버지와 오빠와 동생은 우리 교회 안산성전에서 열심히 하나님께 예배하 며 영생을 얻고 복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저는 안양성전 에서 주님을 섬기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완고 하던 시어머님도 구원해 주셨습니다.
지난 23년의 세월을 돌아보니 참으로 다사다난했고 힘 든 일이 무척 많았습니다. 하나님의 위로와 도우심이 없 었다면 한 시도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고난과 역경의 연 속이었습니다. 그동안 저와 함께 해주시고 저를 지켜주신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와 찬송을 드립니다. 그리고 아직 예수님을 믿지 않고 있는 시누이들과 제 며느리의 구원을 간절히 바라며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 께서 모두 구원해 주시므로 양가에서 기도하고 찬송하는 소리가 집안 가득 울려 퍼지게 될 것을 생각하며 감사기 하나님께 드립니다. 할렐루야! 도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