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2023.12.10]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최홍춘2023-12-10 11:50
작성자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나의 하나님”

 

최 홍 춘




▶저는 중국의 동북부지역 곧 일제강점기에 만주라고 불리던 곳에서 태어나고 자랐습니다. 깊은 산골임에도 구리, 니켈, 철광석 등의 광물이 많이 매장되어 있어서 일본인에 의해 잘 설계된 철로가 놓여 있습니다. 그곳 마을인구의 거의 절반이 조선족이었습니다. 저의 조부모님과 외조부모님 모두 평안북도 출신으로 저는 이민3세에 해당됩니다. 중국공산당원 신분을 가졌거나 6·25전쟁참전 경력을 가진 집안 사람들이 활개치며 사는 데 비해 저희처럼 그렇지 않은 가족들은 힘들게 생활하였습니다.



제가 조선족초등학교에 입학할 때의 중국은 완전한 사회주의 계획경제체제였고,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에는 일부나마 시장경제 체제가 도입되어 생활형편이 조금씩 나아졌습니다. 그러면서 신앙의 자유 또한 어느 정도는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저의 어머니는 15㎞ 떨어진 곳에 세워진 교회를 걸어서 다니셨습니다. 그래도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를 따라서 이웃 사람들의 눈을 피해 몰래 하나님께 예배 드리던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행복감을 느끼셨다고 합니다.



제가 대학교 입학시험을 치를 때가 1989년, 저 유명한 ‘천안문 사태’가 벌어진 해였습니다. 그로 인해 사회가 엉망이었고 뒷배경이 없는 저는 제1지망인 전자공학과 제2지망인 의과가 아닌 화학공업 분야의 대학교에 진학하여 ‘화학공업 기계 및 설비’를 전공하게 되었습니다. 학업성적이 항상 우위에 있었기에 대학졸업 후에 중국에서 가장 큰 국영화학공업그룹회사에 취업하였습니다. 그러나 저처럼 인맥이 두텁지 않고 술담배와 불의한 것을 멀리하는 사람은 항상 박봉으로 생활해야 했습니다.

  


사회에 진출한 후 참석한 고등학교 동창회에서 뜻하지 않게 면식이 있던 자매를 만나서 교제를 하고 약혼까지 하였습니다. 그녀는 멀리 청두와 상하이 등에서 대만 상인을 도와 대나무 공예품 사업을 하고 있었는데 수입이 많았습니다. 가정이 경제적으로 풍족한 데다가 족보가 한국에 있어서 부모님이 일찍이 한국에도 다녀오고 또 조부모를 모신 공로로 한국의 친척들에게서 경제적인 후원까지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녀의 어머니 집안이 대대로 일월성신 우상을 숭배하는 가정이었고 서둘러 저와 약혼시킨 것이 저를 이용하려는 목적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습니다.



그 일을 기화로 저는 중국 땅을 떠나기로 마음먹고 부모님을 설득하면서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마침 중국 당국에서 ‘국영기업 부분민영화’라는 개혁정책을 추진하면서 남아도는 인력을 재배치하기 위한 방편으로 ‘근무일시중단’이란 제도를 운영하므로, 저는 이를 활용하여 2년간의 휴무허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직접 미국비자를 취득하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하여 차선으로 일말의 가능성이 있는 일본을 목표로 정하였습니다. 저를 아는 친구들과 친척과 이웃들 모두 이런 저를 비웃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선진국으로 유학을 간다는 것은 대단한 부와 권력을 쥔 집안의 자녀들이나 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2년간 부모님의 농사일을 돕고 독학으로 영어를 공부하면서 길을 모색하였습니다. 그렇게 고민하며 기도하던 중에 일본의 한 대학교로 파견되어 박사과정을 공부하고 있던 대학시절의 선생님으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가족을 돌보기 위해 잠깐 귀국했다가 일본 유학을 간절히 염원하는 저의 소문을 듣고는 저를 만나서 배움에 대한 의지 등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직접 확인을 하셨습니다. 그분의 노력과 도움으로 저는 드디어 큰돈 들이지 않고 초청장을 손에 쥘 수 있었습니다. 그 귀한 초청장을 근거로 여권을 신청할 수 있었지만 그 과정에서 또 여러 가지 고초를 겪었습니다.



여하튼 1999년 10월에 저는 처음으로 일본땅을 밟았습니다. 저는 일본사회에 빨리 적응하기 위해 거리낌 없이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일본인 친구가 생기게 해달라고 기도하면서, 기왕이면 그 친구의 가정이 중국과의 전쟁에 참여했던 집안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제가 기도한 대로 되었습니다. 일본을 떠날 때까지 저는 그 친구 부부와 친분을 나누면서 조금은 외롭지 않게 지내며 일본에 대한 오해가 많이 불식되었습니다. 드디어 저는 석사학위 과정을 마치고 80년 전통의 금속정밀가공기업에 취업하여 일본에서 안정된 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이 즐겁지 않고 허무한 감정만 크고 깊어지며 나중에는 죽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 당시 저의 가장 큰 염려거리는 중국에 있는 때 묻지 않고 착하고 순수한 누이동생의 앞날에 대한 걱정이었습니다. 그래서 기도하고 있던 중에 저는 놀랍고 기쁜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동생이 중국어 연수를 위해 한국에서 온 신학생과 교제하는 중이며 동생도 예수님을 영접하였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 유학생은 저의 매부가 되었고, 목사안수를 받은 후 현재 중국 땅에서 선교사역에 헌신하고 있습니다.



누이동생에 대한 염려가 사라지자 이번에는 제 몸에서 담대함이라고 할까, 마치 신비로운 에너지가 몸에서 품어져 나오듯 ‘평소에 날카롭고 또 집중을 잘하는 내 성격에 맞는, 무언가 목숨을 걸고서라도 해볼 만한 일이 없을까’하고 새로운 일을 모색하였습니다. 그리고 북한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한 장의 사진을 보았습니다. 굶주린 어린 아이들이 석탄덩어리를 입으로 씹고 있는 그 사진을 보는 순간 분노심이 일고 안타까운 마음에 많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래서 저는 고급 건강식품, 특히 발효식품 개발에 뜻을 두고 맛과 향에 있어서 세계적인 수준의 식품을 제조하는 목표를 세워 도전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처한 일본에서의 상황과 고독한 처지와 같은 조건이 오히려 제가 그 일에 집중하는 훌륭한 조건이 되었습니다.



막상 도전을 시작하자 처음에는 자주 슬럼프에 빠졌습니다. 그럴 때마다 그 상태에서 벗어나고 회복하는 유일하면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예수님으로 말미암는 구원의 은혜와 진리를 믿고 기도하는 생활을 하면서도 사람들에게 제가 진실한 그리스도인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하지 못했습니다. 다만 어머니를 본받아 하나님께 기도하는 생활을 하는 정도에 그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진심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생활을 하자 슬럼프에 빠지는 횟수가 현저하게 줄어들면서 성과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일본에서의 직장생활 10년을 채운 뒤 2년을 더 머물면서 일본열도 최북단 홋카이도에서 시작하여 최남단 오키나와까지 샅샅이 여행한 다음에 한국으로 갈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2011년 3월 11일, 그 끔찍한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저의 직장과 생활하는 곳이 바로 이 후쿠시마시였습니다. 그때 저는 간신히 중국으로 피신해서 4개월 정도 머문 뒤 일본으로 돌아가 직장에 복귀하는 한편, 한국에 갈 생각을 하며 뒤처리를 서둘렀습니다. 전에 별생각 없이 일본 영주권을 받아 두었던 것이 한국비자를 취득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중국에서 짧은 시간에 F4 비자(재외동포 비자)를 직접 취득해서 한국에 올 수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2013년 1월, 처음으로 한국땅을 밟았습니다. 언어소통에 큰 어려움이 없고 계획한 스케쥴 대로 활동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일본에 있을 때부터 제가 맡아보던 친척들과 관련한 잡다한 일들을 먼저 마무리 짓고 잠시 여행을 할 때 전철역 인근에서 구역장님의 전도를 받고 은혜와진리교회의 예배에 참석하였습니다. 중국에서 나올 때 어머니에게 한국에 가면 신앙생활을 잘하겠다고 다짐하고 약속한 것을 생각하고 교회에 나갔습니다. 다시 일본으로 가서 남아있던 일들을 한 달 동안에 완전하게 마무리 지은 후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서 계획한 마케팅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우리 은혜와진리교회에서 제가 바랐던 대로 복된 주일성수를 하게 되었습니다. 당회장 조 목사님의 은혜로운 설교를 듣는 것이 참 좋았습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이 되게 해주시는 하나님께서 저를 굳게 붙들어 주시고 복음전도의 열매와 때를 따라 도우시는 은혜를 확실하고 분명하게 체험하게 해 주셨습니다.



마케팅 작업이 한창일 때 바쁜 업무로 인해 하루 한 끼 정도만 제대로 식사를 하고 자주 유명한 프렌차이즈 제과점에 가서 많은 빵을 사서 음료도 없이 식사를 대신하곤 하였는데, 그런 제 모습을 지켜보던 주인아주머니가 하루는 먼저 말을 걸어왔습니다. 그 후 대화가 잦아지면서 그분을 위해 기도하며 그분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알고 보니 가족 모두 다른 종교생활을 하고 있는 분이셨습니다. 개종하면 가정이 파탄 날 것이라고 했던 그 아주머니가 먼저 우리 교회에 출석하였고 후에 아주머니를 핍박하던 남편분도 우리 교회에 나와서 결신하셨습니다. 할렐루야!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분을 통하여 제가 하는 일에 꾸준한 도움을 받게 해 주셨습니다.



익숙한 듯하면서 그러나 낯선 한국 땅에서, 제가 계획한 일을 실행하면서 저는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일이 이루리라’한 말씀대로 실천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처신하여 행하는 것이 하나님께 맡기는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저의 이 기도를 들으시고 성령님이 깨닫게 해주시고 하나님께서 응답하여 주셨습니다. 코로나19 팬데믹 상황 직전에 중국에 다녀오면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중국의 우상화 작업과 기독교회에 대한 탄압 계획이 무산되도록 하나님의 강력한 권능의 손길로 역사해 주시고 그 능력의 무한함과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는 이 기도도 하나님의 작정하신 때가 되면 이루어질 것을 굳게 믿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제가 한 기도 중에 그대로 땅에 떨어져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다고 인식하고 있습니다.



저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부모님 곁을 떠나 독립생활을 시작한 이후로 그동안 눈물을 흘려본 적이 두세 번 정도일까,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데 은혜와진리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한 이후로는 참 많은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간구하는 눈물과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눈물입니다. 지금 제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증거 곧 눈으로 확인하는 증거 중 하나는 그렇게 많았던 세상 친구들이 모두 저를 멀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마치 그동안 저를 둘러싸고 있었던 크고 작은 바윗돌들이 다 사라지고 그 대신 가장 값비싼 다이아몬드 반지가 하나 둘 저의 손가락에 끼워지는 것만 같습니다.



“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것을 지어 성취하는 여호와, 그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자가 이같이 이르노라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예레미야 33:2,3) 하나님께서 이 성경말씀의 깊고 오묘한 뜻을 체험을 통해서 깊이 깨달아 알게 해 주셨습니다. 한국에 와서 신앙생활을 시작한 이후로 생활에 슬럼프가 없고 대신 마음이 항상 상쾌합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그날이 성큼 다가온 오늘의 현실을 뚜렷이 인식하게 된 고로 그날의 기쁨과 영광을 생각하며 매일 신령한 행복감으로 충만한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대학에서 제가 원치 않았던 ‘화학기계 공업 및 설비(플랜트)’를 전공하여 쌓은 지식이 오늘 제가 일하는 식품관련산업에 있어서 매우 유익한 기반지식으로 쓰이고 있는 것을 생각할 때, 이 역시 하나님께서 저를 위해서 미리 예비하시고 인도하신 것임을 믿고 감사를 드립니다. 하나님께서 저에게 헌신할 기회를 주셔서 주일에 성가대에서 봉사하면서 예배를 위해 헌신하는 즐거움까지 누리게 해 주셔서 더욱 감사합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욥기 23:10) 저의 모든 일이 앞으로도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