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이너 (ᄑ 1,11)
저
16.10.16
(간증)
66
'고난 가운데
도우시는 하나님
-이정님-
는 어릴 때부터 아무것도 모르는 체 아버지 를 따라 교회에 다녔습니다. 풍금소리에 맞 추어 노래하고 춤추며 크리스마스에 선물 받는 게 그저 재미있어 다녔지요. 초등학교 6학년 때 백만 명 이상이 죽어나간 끔찍했던 6.25를 맞이했고, 당 시 금융조합 이사였던 아버지는 곧 전쟁이 끝난다 하시며 놋그릇들은 모두 관사 우물에 던져두고 옷 장들은 뒤로 해서 벽을 향하게 하고는 우리 모두 양 촌 외가댁으로 피난을 갔습니다.
아버지 말대로 전쟁은 빨리 끝나 주지 않고 우리 에겐 슬픈 소식이 들려옵니다. 평소 백범 김구 선생 을 도우며 민족주의자로 자주독립운동을 외쳤던 할아버지가 좌익으로 몰려 군인들에게 총살을 당 했다는 것입니다. 평소에 할아버지가 좋아하셨던 찬송을 부르며 애통해 하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지 금도 생각납니다.(찬송가 371장, 삼천리 반도 금수 강산 하나님 주신 동산) 빨갱이들 세상이 되고 보니 빨갱이 아버지를 둔 아들을 그들이 그대로 둘리 없 지요.
아버지를 모셔다 부역을 시킵니다. 영웅의 아들 이라 칭하며 중한 일을 시켰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 다. 다시 9-28 수복이 되고 자의든 타의든 부역을 한 아버지는 숨어서 지내야 했고 겨우 14살이 된 오빠 와 함께 산으로 들어가 빨치산이 되지요. '멀리멀 리 갔더니 '찬송은 아버지와 이별하면서 마지막으로
불렀던 찬송입니다.
그때 어린 저는 내게 닥친 시련을 피하지도 않고 포기하지도 않으리라는 결심을 합니다. 지금까지 의 내 삶이 내 의지와는 다르게 지금은 어린 가장 이 되어 있지만 하나님 손을 꼭 잡고 절대로 슬퍼하 지 않고 지금의 내 배역에 충실하며 살기로 했습니 다. 우리는 아침마다 남은 가족끼리 서로의 손을 붙 들고 울며 기도했습니다. 그 길만이 이 난관을 헤쳐 나갈 수 있는 유일한 문이었거든요.
그때 아버지 소식을 듣게 됩니다. 공비토벌에서 잡혀 대전 교도소에 있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구 명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천명 넘게 서명을 하여 탄원서를 내주었고, 드디어 아버지는 집행유예로 가석방되어 나옵니다. 비록 오빠는 산에서 잃었지 만, 우리는 아버지와 기적 같은 상봉을 하고 하나님 께 감사의 예배를 드렸습니다.
어느덧 친구들은 중학교 2학년에 올라가고 있었 지요. 이젠 학교에 갈 일이 과제입니다. 그때의 형편 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지만 공부는 때를 놓치면 할 수 없음을 알고 아버지께 학교에 가겠다는 허락 은 받아 냅니다. 몸이 자유롭지 못한 아버지이기에 초등학교 졸업장도 없는 제가 근처 중학교에 찾아 가 교감 선생님을 만나 사정을 합니다. 어린 소녀가 너무 가엾어 보였든지, 중학교 2학년으로 입학을 시 켜 주었지요. 다음날 여동생도 근처에 있는 초등학 교에 5학년으로 입학이 됩니다. 내 안에 계신 하나 님이 저에게 그 같은 용기를 주시고 기적을 행하여 주신 것입니다.
원래 머리가 좋으셨던 아버지는 한의사 시험을 보 아 당당하게 합격이 됩니다. 한의원을 차리고 생활 이 안정되어 갈 때쯤 제가 이 종복님을 만나지요. 가난한 가정의 육남매 중 장남으로 고등학교만 졸 업하면 시골에서 농사를 짓겠다고 하더군요. 하나 사람 됨됨이를 잘 보시는 아버지는 그이에게 대학
진학을 해보라고 권합니다. 저는 그 당시 사범학교 졸업반이었습니다. 쓰레기 더미에서 장미꽃을 피 울 수 없다'고 사양하는 이 종복님에게 저는 답했지 요. "내가 함께 쓰레기 더미에서 그 장미꽃을 피워 볼까요?" 그 이야기를 들은 친구들은 걱정했습니 다. '소도 언덕이 있어야 비빈단다.' 하며 만류합니 다. "언덕은 내가 만들어 비빈다"고 응수하니 모두 들 기가 막혀 하는 표정들이었습니다.
저는 27세에 이 종복님과 결혼을 합니다. 아버지 는 경제적으로 도움을 주며 축복해 주셨지요. 결혼 하고 낳은 첫 아이가 뇌성마비였습니다. 기도의 끈 을 놓지 말고 늘 주님 곁에 있으라는 뜻으로 알고 그 아들을 위해 최선을 다하며 하나님께 기도했습 니다. 아들은 성치 못한 다리로 물리학 박사가 되고 결혼하여 지금 잘 살고 있습니다.
이것이 끝이 아닙니다. 이 종복님이 뇌경색으로 쓰러진 것입니다. 2015년 11월 15일에 쓰러져 대.소 변을 보지 못하고 언어도 제대로 소통이 안 되는 상 태의 마비가 왔습니다. 조용목 목사님이 병원에 오 •셔서 기도해 주신 후 “장로님, 12월 25일 크리스마 스에는 교회에 나오세요. 주님의 이름으로 명령합 니다." 하시고 떠나셨습니다. 그 해 12월 25일, 이 종 복님은 40일 만에 병상에서 일어나 평택성전에 나 가서 하나님께 예배 드렸습니다. 할렐루야!
내가 비록 1달란트의 운명으로 태어났어도 그 운 명을 몇 배의 달란트로 바꾸어 놓을 수 있도록 섭 리하신 하나님 은혜에 감사합니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시편 119편 71절 시인의 고백처 럼 여기까지 나를 환난에서 인도해 주신 하나님 아 버지께 감사드릴 뿐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시험이라면 앞으로도 옵처럼 순종하며 끝까지 믿음 을 지켜 나갈 것입니다. 절대로 하나님 손 놓지 않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아멘. 으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