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간증) -이덕예-
12.7.1
"저희 가족을 구원하시고 치료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찬송하고 또 찬송합니다."
제가 태어나고 자란 곳은 계절마다 그 변화가 뚜
렷한 단아한 어느 농촌이었습니다. 그 시대만 하여도 남자아이를 선호했고 다분히 가부장적이었습 니다. 저희 집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많은 제사와 명 절에는 손님이 끊이지 않았고 우상숭배와 인본주의의 삶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정작 집안의 무거운 분위기는, 아버지께서 장남이셨는데 오랫동안 기다렸다 얻은 아 들이 어릴 때 죽음으로 그 낙심이 크셨기 때문이었습니 다. 저와 제 여동생은 열심히 공부하여 반장을 하고 상 을 타오면 아버지께서 상을 머리맡에 두셨어도 그 슬픔 에는 약간의 위로뿐이었습니다.
세월이 흐르고 세상이 변화되어가고 아버지께서 더 많이 연로하셨을 때는, 저희들에게 미안해 하셨습니다. 그 당시 저희 집안에는 고모님 한 분만이 독실한 기독 교 신자였습니다. 제가 결혼을 하여 서울에 올라오고, 아버지는 돌아가셨습니다. 저는 아들 둘을 낳아 기르면 서 아버지 생각을 많이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실제적인 믿음생활을 미루고는 있었지만 자주 하나님 께 감사기도를 드렸습니다.
두 아들을 잘 기르기 위해서는 저 혼자 감당할 수 없 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떤 날은 두 아이의 손 을 잡고 동네 교회에 가서 교회당 안을 들여다보고 앞 마당에 앉아 있기도 했지만, 아무도 만날 수 없어서 그 냥 돌아오곤 했습니다. 1987년도에 안양으로 남편의 회 사를 따라 이사를 왔습니다. 곧바로 두 아들을 집 앞 동 네교회로 보냈습니다.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요 1:17)
생활은 안정이 되어갔지만 제 성격 탓인지 평소에 소화기관인 장이 약해서 불편을 겪고 고생이 되었습니 다. 병원에서는 신경성이라고 했습니다. 결국, 아주 많 이 쇠약해져서야 마침내 하나님께로 나아가게 되었습 니다. 우리 은혜와진리교회 대성전에 처음 와 앉았을 때 어찌나 마음이 평온하고 아늑하던지 내가 와야 할 곳으로 왔다는 안도감을 느꼈습니다. 예배에 곧 익숙 해지면서 저를 인도해주셨던 수구역장님께 십일조 등 헌금에 대하여 여쭈어 보았습니다. 그런 후 조금이지 만 첫 달부터 하나님께 헌금을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유난히 약했던 큰 아들을 생각하면서 드렸던 의료선교 회 헌금은 정말 기뻤습니다. 제 몸 또한 점차 회복되어 갔습니다.
인간의 죄와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에 대하여 깨닫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에 대한 믿음이 점 차 깊어졌습니다. 집사의 직분, 구역장의 직분을 받았 고 세월이 흘러 수구역장과, 성가대원, 교사로 봉사를 할 수 있었습니다. 예배를 드리고 목사님 설교말씀을 들으면서 실천에 옮기게 되고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 는 중에, 하나님께서는 남편이 다니던 조그만 조립식건 설회사 사업장을 좋은 조건으로 인수받는 놀라우신 은 혜를 주셨습니다. 저는 예레미야 33장 2, 3절의 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것을 지어 성취하는 여호와, 그 이름 을 여호와라 하는 자가 이 같이 이르노라 너는 내게 부 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는 말씀의 실황을 하나님 께서 저희 앞에 전개하시고 계신다고 믿었습니다.
아이들은 교회학교와 청년부에서 예배드리고 봉사 하며 자랐고, 남편은 성가대원, 교회학교 교사, 남성구 역 구역장으로 봉사하면서 장로의 직분에까지 이르게 하셨습니다. 둘째 아들은 음악에 재능이 있어서 비올라 를 전공하였는데 더 큰 비전을 갖고 싶어하였습니다. 저는 아들을 위하여 매일 교회에 가서 기도를 드렸으며 기도노트에 제목을 기록하여 3개월 가까이 기도하고 기도가 끝난 후에는 꼭 교회 기도상자에 넣곤 하였습니 다. 하나님께서 저의 기도를 고스란히 들어주셔서 미국 애리조나주립대의 편입시험에 합격하고 장학금을 받 아 공부하게 되었으며 공부하는 중에도 계 속하여 장학금을 받게 해 주셨습니다. 저는 주님을 영접하여 생활하면서부터 는 세상의 모든 것보다 하나님이 우선이었 ・고 그 다음이 남편, 자식이었고 맨 마지막 이 저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믿음이 제가 많은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성경의 모든 말씀과 계명을 주신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렸습니다. 한편, 작년에는 중학교 교사로 봉직하던 저의 큰 아들이 학교에서 소풍을 갔습니
다. 그날 밤 늦은 시간 금요기도회를 마치고 집으로 막 돌아왔는데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어머니! 지금 제가 병원에 있는데요, 왼쪽눈이 보이 지 않습니다. 제가 잘못을 한 것 같습니다."라고 얼버 무리면서 "너무 당황하지 마시고 침착히 오세요" 하는 것이었습니다. 갑작스런 일이라 무척 당황하였습니다. 회식자리에서 120ml 정도의 맥주를 받아 조금 마셨는 데 갑자기 눈앞에 검은 점이 보이더니 점점 커져 보이 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하나님께 잘못한 것을 고백했다지만 그 순간 저는 모든 것이 허물어져 내리는 것만 같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조금만 더 생각했 더라면' 하는 아쉬움과 아이들을 위해서 완벽하려고 기도하고 노력했던 제 자신이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습 니다.
남편은 지방에 내려가 있었고, 공교롭게 그날은 1년 에 한번 있는 전국의 모든 안과 전문의들이 세미나가 있어 월요일에나 만날 수 있다하여 저희 아들은 서울의 큰 병원까지 갔으나 망막박리현상으로 1초가 급한 상 태였습니다. "이미 시력은 다시 찾을 수 없을 것이다." 라고도 하였습니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 믿음과 두려 움이 교차하며 저를 오그라들게 하였습니다. 그때처럼 교회와 목사님 생각이 간절한 적은 없었을 것입니다. 집으로 돌아온 시간이 아침 6시였습니다. 목사님께서 전화해 주시고, 간절히 기도해 주셨습니다. 입원하여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맡기고 수술을 하였습니다. 이사 야 41장 10절의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 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 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는 말씀을 굳게 붙잡고 믿음으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퇴원하여서도 1달이 넘도록 엎드려 있어야 했고 괴로운 시간을 지나야 했습 니다.
당회장 목사님, 그리고 여러 교역자님, 구역장님, 또 봉사부서의 성도님께서 기도해 주셔서 정확한 형체는 보이지 않지만 노란 바탕으로 무언가 보인다고 하였을 때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감사한 순간이었습니 다. 지금은 하나님께서 기적을 베풀어 주셔서 완전 회 복되어 정상적인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할렐루야! 하 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그리고 얼마 전에는 우리 교회 안에서 귀한 배우자를 만나서 결혼도 하였습니다. 이제 더욱 경건한 마음가짐 으로 겸손히 주님을 섬기며 기도하면서 끝까지 이 귀한 복음을 믿지 않는 영혼에게 전하기를 힘쓰며 살 것입니 다. 미국 유학 중인 작은 아들도 학업을 다 마치면 하나 님께서 주신 달란트로 주님께 영광 돌리며 살 것입니 다. 여호와 하나님, 저희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더 욱 의지하면서 열심히 복음을 전하며 살겠습니다. 할렐 루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