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2011.12.18] "WCC란 무엇인가?"-제5장…②2011-12-18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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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CC란 무엇인가?' - 제5장 용공주의…②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전 대통령이며 노벨평화상 수상자 넬슨 만델라는 '만델라 자서전: 자유를 향한 머나먼 길'(2006)에서, 자신도 공산주의 사상에 깊이 매료되었다고 한다. 아프리카의 민족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은 서로서로를 이용하며 단합하고 있었다. 만델라는 "인종차별의 어둠 속을 헤매는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공산주의)변증법적 유물론은 등불과 같았으며, 나아가 인종차별을 종식시킬 수 있는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는 듯이 보였다. …역사는 투쟁과 획기적인 변화를 통해 진보한다는 주장 역시 호소력이 있었다."라고 한다. WCC는 공산주의와 관련 있는 아프리카 민족주의와 애국투쟁 단체에 거액을 지원한 사실은 부정하지 않는다. 'WCC 40년사'는 WCC의 나이로비 총회와 밴쿠버 총회 사이에 가장 많은 대중적 관심이 WCC의 인종차별투쟁사업 특별기금 사용에 있었다고 설명한다. 미화 5만 5천 불의 원조금을 짐바브웨/로디지아 애국전선 활동에 지원했을 때는 항의의 물결이 출렁댔다고 한다. WCC는 지원금이 폭력에 사용되는 것을 문제시 하지 않았다. "자신들의 불만을 제거함으로써 새롭고 보다 정의로운 사회 질서(를 향하는) 길을 열기 위한 유일한 마지막 수단으로 폭력에 호소할 수밖에 없게 되어 버린 인종차별 희생자들에게 어떤 판결을 내리지도 않는다."고 했다. 무기를 사용하는 자들에게 대한 재정 지원을 중단하지도 않겠다는 것이며, 폭력 사용을 사실상 용인했다. WCC에 가입한 소련정교회, 루마니아정교회, 불가리아정교회, 폴란드정교회 등 공산권 교회들의 발언권과 역할이 강화되었다. 공산권 국가 교회지도자들은 WCC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중국교회 대표자 차오(T. Chao)와 체코의 '공산주의 신학자' 조셉 흐로마드카는 첫 총회 때부터 WCC 중앙위원회 위원이었다. 그는 공산주의를 찬양하고, 체코 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활약했다. 케냐 나이로비에서 모인 WCC 제5차 총회(1975)의 의장으로 선출된 러시아정교회의 메트로폴리탄 니코팀은 러시아첩보기관(KGB)의 첩자였다. 소련은 러시아정교회를 이용하여 WCC에 접근했다. 러시아정교회는 교육부에 직원 10여 명을 두고 있을 때 국제관계부에 100명 이상의 직원을 고용하고 있었으며, 이들은 러시아비밀경찰((KGB) 직원들이었다. 1992년 미국 하원에 제출된 보고서는 소련이 자신들의 정책과 이념을 세계에 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 WCC를 이용했다고 한다. 소련은 배후에서 WCC를 움직였다. WCC가 단순히 공산주의 활동을 용인하고 인간화와 인종차별정책 프로그램이라는 이름하에 거액을 혁명투쟁 게릴라 집단에게 준 정도가 아니라 공산정권이 통치하는 소련의 지휘를 받는 정교회 대표자들을 통해 친소 용공주의 활동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WCC는 공산주의 정권 아래서 고통당하고 신음하는 기독교인들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다. 인권 문제는 차제에 부치더라도 "신앙의 자유를 허락하라."는 말조차 하지 못했다. 무신론 정권과 야합한 변절한 기독교회는 회원으로 가입시키고 '하나의 거룩하고 공교회적이며 사도적인 신앙'을 가진 신앙고백공동체의 처절한 고통과 신음에는 외면했다.
3. 한국교회의 WCC 용공 논쟁 용공
이데올로기 정책을 지향하는 WCC 가입 문제로 1959년 한국장로교는 분열했다. 미국 선교사들은 그들이 속한 본국 교회가 지향하는 노선에 따라 WCC에 가입하고자 하는 편을 지지하고 막대한 재정을 지원했다. 그러나 상당수 한국 기독교인들은 기독교와 공산주의가 양립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WCC 가입을 반대했다.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목사들 가운데는 WCC의 신학과 선교 방향을 내심 걱정하는 자들이 있었다. 이러한 움직임을 간파한 KNCC는 1959년에 "한국기독교연합회 성명서'를 발표했다. "비복음적인 어떤 세속적 사상이나 운동과도 절대로 타협하지 않는다. 에큐메니칼 운동은 세계 교회들이 교회의 머리되시는 한 주님 안에서 피차에 하나 되기를 바라고 있으나 무조건 교회를 합동시키는 단일교회 운동이나 비성서적인 신학사조를 주장하거나 용공운동을 용납하지 않을뿐더러 공산주의와 로마카톨릭주의, 그리고 신앙사상의 혼합주의 등을 절대 배척하고 있다."라고 성명했다. 그런데도 걱정이 잠재워지지 않았다. WCC 관련 단체들은 독재 권력에 대한 한국 민주화 운동, 산업화 과정에서 생기는 문제들을 해결하도록 지원했다. 그러자 KNCC는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 선언'(1988)이라는 고백문에서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분단체제 안에서 상대방(북한)에 대하여 깊고 오랜 증오와 적개심을 품은 죄에 대하여 하나님과 민족 앞에 고백한다."라고 했다. "특히 남한의 그리스도인들은 반공의 이데올로기를 종교적 신념처럼 우상화하여 북한 공산정권을 적대시한 나머지 북한 동포들과 우리와 이념을 달리 하는 동포들을 저주하기까지 한 죄를 범했음을 고백한다."라고 했다. '반공' 태도를 유지해 온 것이 '죄'라는 것이었다. 미군은 철수해야 한다고 했다. 남북이 대치해 있는 상황에서 반공을 기독교 신앙과 거의 동일하게 생각하던 한국기독교인들은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공산주의 정권의 종교탄압을 경험한 사람들은 자유민주주의 정치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 미군 주둔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 시점에, 한경직 목사를 중심으로 한국기독교총연합회가 출범했다.
결론: 사실호도와 역사 재평가의 과제
한국교회 지식인들이 WCC의 용공주의를 지적한 보수계 기독교인들에게 경악된 유감을 드러내고 질타한 것은 진실을 왜곡하고 사실을 호도한 것이다. 역사를 힘의 논리로 기술한 하나의 예이다. 교회사가들의 반성과 한국교회 역사 바로쓰기를 재촉한다. 기독교 신앙을 특정 정치체제나 이데올로기와 동일시하면 성급한 오판을 초래할 수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비판이 바로 공산주의 지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친미가 반공을 뜻하지 않으며, 반미가 친공을 뜻하지도 않는다. WCC는 공산주의에는 관대했고, 자본주의에 냉혹했다. 친사회주의, 반미 성향의 용공주의 활동에 적극적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백인우월주의에 저항하는 민족주의 인권투쟁 단체들에게, 인민을 쉽사리 죽이고 굶주리게 하고 괴롭힌 이데올로기 집단에, 인종차별을 반대하는 마르크스주의 무장 정치단체에 오랫동안 거액을 지원한 것은 역사 평가의 과제로 남아 있다.
(다음 호에 계속)